팥죽은 ‘흔한 특식’이었다. 엄마가 내킬 때 혹은 동지 때마다 상에 오르니 흔한 음식이었고, 그렇다고 늘 먹는 음식은 아니니 특식이기도 했다. 언젠가부터 팥죽에 '흔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기 어려워졌다. 점차 팥죽은 ‘특식'으로 굳어졌다.
자취를 시작할 무렵에는 돈이 지금보다 훨씬 귀했다.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서 돈 나가는 일이 많아서 긴장하며 관리 해야 했다. 무언가 해 먹을 체력과 시간이 도저히 나지 않아 외식을 하게 되면, 집에서 자주 맛보지 못한 자극적인 음식을 먹곤 했다. 닭갈비나 돈가스, 피자 같은 것들이 대부분 이었다. 기껏 돈 주고 사 먹는데, 팥죽 같은 음식은 구태여 찾지 않았고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어느 날 메뉴판에 빼곡히 적힌 음식 중에서 유독 팥죽이 눈에 들어왔다. 홀리듯 주문하고 기다리는데 우쭐한 기분이 들었다. 집에서만 먹던 팥죽을 이제는 사서 먹는다며, 정말 독립했구나 하고 스스로가 대견했다. 이윽고 주문한 팥죽이 앞에 놓였다. 대견했던 마음은 말끔하게 사라지고 눈앞의 음식에 벙-쪄버렸다.
팥죽에 익은 쌀알만 가득했다. 말 그대로 죽이 나온 것이다. 늘 먹던 팥죽은 칼국수 아니면 새알심이 들어갔기 때문에 눈앞의 팥죽은 난생처음 보는 음식이었다. 식감과 맛이 영 어색해서 몇 수저 뜨지도 않고 식당을 빠져나왔다.
부모님은 전라도 사람이다. 전라도에서는 쌀 대신 주로 칼국수를 넣어 먹고 동짓날에는 새알심을 넣어 먹는다. 칼국수를 넣은 것은 팥죽이라 부르고 새알심을 넣은 것은 동지 팥죽이라 부른다. 만일 내가 늘 먹던 팥죽을 먹고 싶다면, 팥죽이 아니라 팥칼국수를 주문해야 한다는 걸 그때 처음 알게 되었다. 당시에는 팥칼국수가 그리 흔한 메뉴는 아니었다. 살고 있던 동네에는 파는 곳이 아예 없던 터라, 결국 엄마 집에 갔을 때 어쩌다 운 좋게 상에 오르면 먹는 수밖에 없었다. 몇 년이 지나서야 파는 곳을 몇 군데 발견할 수 있었고 단골집도 생겼다. 팥죽(팥칼국수)은 더이상 ‘흔한’ 음식이 아니었다. 요리에 재미를 붙일 즈음 직접 요리하면서, 팥칼국수는 완전히 ‘특식’이 되었다.
팥칼국수는 품을 들일수록 맛있어지는 음식이다. 재료가 팥, 물, 밀가루, 소금으로 음식에 언뜻 보이는 것이 거의 전부이다. 그만큼 단순하기 때문에 자칫 개성 없는 음식이 되기 쉽다. 가령, 팥국을 만들 때 삶은 팥을 믹서기에 갈면 품은 덜 들지만 꺼끌거리는 팥국이 된다. 오랜 시간 삶아도 덜 여물거나 묵어서 단단한 팥도 함께 갈릴 것이고 잘게 흩어진 껍질 또한 좋은 식감을 내지 않을 테니 말이다. 품은 좀 들더라도 가는체에 삶아진 팥을 눌러가며 앙금을 내리는 것이 좋다.
품은 들어도 해봄직하다. 얼마 되지 않는 재료가 맛있는 음식으로 변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건 꽤 즐겁다. 팥의 냄새와 색이 변하고 거친 반죽은 점차 매끈해진다. 작업대 옆에는 팥의 빈 껍질이 쌓여있고 애써 내린 앙금은 곱다. 넓게 민 반죽을 칼로 반듯하게 썰고 있노라면 장인이 된 것도 같다.
한인 마트에 언젠가부터 인스턴트 팥칼국수가 매대 한 켠에 줄지어 있다. 언뜻 보고는 이제 라면까지 출시되었으니 한국에 팥칼국수를 파는 곳도 전보다 많아졌으려나 하고 궁금해진다. 그리곤 생각한다. 인스턴트 팥칼국수를 궤짝으로 사서 끓여 먹더라도, 파리에 팥칼국수 집이 여럿 생기더라도, 팥칼국수에 다시 ‘흔한’이라는 수식어가 붙지는 않을 것 같다고. 만드는 과정과 수고를 알며 옛 맛을 기억하고 있으니, 팥칼국수는 앞으로도 ‘특식’일 거라고.
팥 삶기
칼국수 반죽
팥칼국수
1. 전날, 팥 불리기
2. 팥 데친 물 버리기
3. 팥 삶기
4. 반죽하기
5. 팥 삶은 물과 앙금 받기
6. 반죽 밀고 썰기
7. 면 삶고 헹구기
8. 팥칼국수 끓이기
* 노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