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방향
Direction of My Heart
Garden view through a window

쓸모 있는 사람이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 나를 소모하는 일에서 멀어지고자 하고 싶은 일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강의와 블로그, 집안일에도 의무감을 떼어내고 내킬 때만 했다. 집안일은 해야만 하는 일이 어쩔 수 없이 계속 생기기 때문에 컨디션을 점검하면서 지금 할지 나중에 할지를 결정했다.

일을 더 하거나 덜 한다고해서 어떠한 문제도 생기지 않는다. 나를 제외한 모든 건 늘 그래왔다는 듯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디자인하던 시절 옛 친구를 만나 서로의 일 얘기를 주고받던 때가 떠올랐다. 지금 이런 일을 하고 있고 이런 점이 신경이 쓰이고 이런 점이 고되다며 꽤 열중해서 얘기했던 것 같다. 이야기를 차분히 듣던 친구는 대화의 끝자락에 "디자인하는 거 즐거운 게 맞아?"라고 물었다. 잠시 고민하다가 때때로 힘들긴 하지만 대체로 즐겁다고 답했다. 돌이켜보면, 당시에 디자인은 정말로 재밌었는데 순수한 즐거움보다는 인정받고 싶어서, 잘 해내야만 할 것 같은 압박이 커지던 때이지 않았나 싶다.

버텨내지 못할 수준으로 압박이 지배적이게 되자 디자인을 놓아버렸다. 후련함과 동시에 아쉬움이 남았다. 다시 시도해볼까 여러 차례 고민했고 매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돌아섰다. 디자이너라는 오래된 꿈과 어느 정도 성장한 정체성이 사라졌다. 뭐든 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아서 불안했다.

불안한 상태로 싱가포르에 살게 되었고 그곳에서 내가 심은 정체성은 집안일이었다. 집을 돌보고 가꾸면서 그걸 잘 해내는 사람으로 인정받는 것. 디자인의 ‘정리’라는 속성은 집안일과 겹치는 부분이 많아서 적성에 맞았고 잘 해낼 수 있어서 기뻤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디자인과 마찬가지로 해야만 한다는 압박이 지배적이게 되었다. 집이 더러우면 안 될 것만 같았고 어쩌다 피곤해서 치우지 못하면 내내 마음 쓰였다. 누군가가 나를 탓할 것 같았고 이은재에게 괜히 미안해했다. 더러운 모습을 보면 한숨이 나오고 화가 치밀고 어릴 적 방치되어 엉망이던 집이 연상됐다.

다시금 압박의 무게를 덜고자 요리에 집중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이전에도 좋아했지만 조금 더 본격적으로. 책을 사들여 공부하고 연구하며 과정을 세세하게 기록하기 시작했다. 도시락을 판매하면서 박차를 가했다. 여전히 집안일이 신경이 쓰이긴 했지만, 그 밖에 챙겨야 할 일이 한둘이 아니어서 어쩌다 놓치는 일은 불편한 감정이 올라와도 못 본채하고 넘어갔다.

아주 조금이지만 돈을 버는 것, 기록이 계속해서 쌓이는 것, 기억 속의 요리를 비슷하게 재현해나가는 것, 할수록 점점 나아지는 것, 먹고 싶은 맛을 만들어낼 때의 기쁨, 무언가 해냈다는 뿌듯함, 재료를 손질하면서 조그마한 생명력 같은 걸 마주할 때의 감동. 즐거움의 존재감이 아주 커서 압박을 밀어내고 계속할 수 있었다.

이토록 재밌는 일을, 의무감과 쓸모의 증명 그리고 그게 나의 정체성을 결정한다고 여기는 것에 압사시키고 싶지 않다. 사실 지금도 블로그나 강의를 진행할 때, 즐거움과 의무감이 강렬하게 업치락뒤치락 한다. 한 단계를 끝내면 기진맥진해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게 두렵고 조금은 슬프게도 해야 할 것 같아서 할 때도 적잖이 있다.

쓸모 있는 사람이 되고 싶은 욕망, 의무감, 압박감 같은 감정이 무조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필요하다고 여긴다. 다만 나보다 앞서가지 않게, 위력적이진 않을 정도로 적당하게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 나의 즐거움이 먼저고 그다음이 세상에 나를 흘려보내는 일이다. 무언가 풍성하게 쌓이면 뱉어내고자 하는 마음이 생길 것이고 자연스럽게 어느 순간 어느 곳의 누군가에게는 쓸모 있는 일을 하고 있을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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